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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일보2017.6.14] "신모계사회"뒤엔 딸의 가사노동 떠맡는 친정있다
작성일 2017-06-14 조회 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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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여성 사회활동 늘고 전통적 가족은 해체

‘육아, 가사노동은 여성 몫’ 인식 그대로

“친정과의 교류 증가, 여성차별의 징후”

재산은 아들 주고, 효도는 딸에게 기대

아들에 비해 딸과의 정서적 거리를 가깝게 느끼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아들에 비해 딸과의 정서적 거리를 가깝게 느끼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전수연(34)씨의 다섯 살배기 딸에게 ‘우리 할머니’는 전씨의 친정 어머니를 가리킨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며 하루에도 서너 번씩 만나는 외할머니는 익숙하지만, 명절 때나 겨우 보는 친할머니의 존재는 평소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씨는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을 봐도 대부분 친정 근처에 살지, 시댁 가까이 신혼집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굳이 시댁 근처에 사는 건 남편의 부모님이 집을 사줬을 때 정도”라고 전했다. 전씨의 남편 윤모(36)씨는 “장모님은 결혼 전부터 자주 봬 익숙한데다가, 또 부인이 외동딸이라 (친정)근처에 집을 얻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고 말했다. 맞벌이인 부부가 집을 비우는 낮에 택배를 받거나, 반찬거리를 사놓는 등 가사 전반을 전씨의 친정에서 도맡다 보니 본의 아닌 준(準)처가살이를 하게 됐다는 것이 윤씨의 설명이다.

결혼 후에도 시댁보다 친정과 가까이 지내는 신(新) 모계사회가 도래했다. 친정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아들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 ‘출가외인(出家外人)’은 딸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 이면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또 다른 ‘딸들의 잔혹사’라는 한탄도 흘려 들을 수 없다.

장남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모시는 전통적인 관념이 옅어지면서 아들보다 딸과의 거리를 가깝게 느끼는 현상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서도 ‘가장 자주 접촉하는 성인 자녀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장녀’를 꼽는 응답이 36.0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장남(33.8), 차남 이하 아들(14.4) 순이었다. 반면 2006년에 실시한 같은 조사에서는 장남(38.0), 장녀(30.6), 차남 이하 아들(17.0)의 순서였다. 10년 사이 장남과 장녀의 순위가 바뀐 것이다. 최근 자궁근종으로 수술을 한 한모(55)씨는 “입원한 내내 딸이 마치 엄마라도 된 양 살뜰하게 챙겨 ‘딸 가진 보람’이 이런 건가 싶었다”면서 “같은 성별이다 보니 유대감도 깊고 남편이나 아들한테 말할 수 없는 속내도 털어 놓을 수 있어 연락이 잦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은 부모세대다. 연년생 남매의 결혼 후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이모(58)씨는 “얼마 전 내 생일이었는데, 딸네 부부는 양손에 바리바리 선물을 들고 와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한 반면 아들 부부는 그 날밖에 시간이 안 된다며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며 “며느리에게 서운한 티를 냈더니, 아들이 화를 벌컥 내더라”고 말했다. 결혼 전에는 애교가 많아 ‘마마보이’라고까지 불리던 아들이었는데,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이씨는 토로했다. 신영훈(65)씨도 “큰딸애가 워낙 평소에도 살가운 편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사위와 함께 건강검진이다, 보약이다 뭐다 해서 철마다 챙긴다”라며 “아들은 빚내서 집까지 얻어줬는데, 며느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자주 가보지도 못했다”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신씨는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딸을 더 낳을 걸 그랬다”고 했다.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여아 선호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임신 7개월 차인 오모(32)씨는 “처음에 뱃속 아이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운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면서 “나도 장녀였고, 큰 딸은 엄마의 평생 친구라는 말도 있어서 누구보다도 딸을 원했다”고 말했다. 오씨는 “딸을 꼭 낳고 싶긴 하지만, 혹시 둘째도 아들일까 아이를 또 갖기가 무섭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딸 둘은 ‘금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는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만큼 아들은 키우기 쉽지 않고, 보람도 적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딸바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할 정도다. 산부인과 의사 한모(38)씨도 “아이의 성별이 아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실망하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며 “(과거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임신 32주 전 태아의 성별을 부모에게 알려주지 않는 의료법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이 현장에서 자주 나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와 맞물려 전통적 가족 형태가 해체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거세진 여풍(女風)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에 대한 이중차별의 결과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시간이 늘어난 반면 육아 및 가사노동이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친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를 대신 떠맡게 됐다는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그리고 가정 속 이중노동에 시달리는 딸들이 독립적 삶을 꾸릴 수 없기 때문에 친정과의 교류가 늘어가는 것”이라며 “엄마들은 딸이 자신의 불행한 삶을 반복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딸의 가사노동을 대신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애교 많은데다가 효심까지 깊은’ 여성의 성별적 고정관념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나온다. 호주제 폐지에도 관습법이 남아있어 재산 상속 등에서 남녀 차별이 여전한데도 딸에 대한 부모들의 기대심리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임모(29)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오빠가 계속 낙방하자 결국 작은 카페를 차려준 부모님이 내가 취업시험을 준비할 때는 얼른 취직해야 돈 모아 시집가지 않겠느냔 말 밖에 안 했다”면서 “그래 놓고 취업 후엔 효도는 역시 딸이라고 치켜세우는 부모님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씁쓸해 진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 교수는 “오히려 대물림 되는 딸들의 잔혹사, 그리고 여성차별의 징후로 보는 것이 맞다”고 일갈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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