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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성신문] 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여성 연주자가 돌아갈 자리가 있는 곳
작성일 2019-09-26 조회 6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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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교향악단(이하 광주시향)에서 첼로 단원으로 있을 때 ‘여자들은 집에 가서 살림하니까 연습도 안 해온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그게 박히더라구요. 그렇다고 그런 말에 휩쓸리거나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여성 단원들끼리 공부하자고 모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성 전문연주인으로만 구성된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이하 광주여성필)는 그렇게 탄생했다. 20년 동안 480여회의 공연, 여성가족부 장관상, 평창동계올림픽 문화 초청공연 광주광역시 대표 등 민간음악단체로는 드물게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광주여성필을 이끄는 김유정 단장은 아직도 첫 공연을 기억한다.

“1999년 광주시향, 목포시향 단원들 20여명이 ‘광주여성체임버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창단연주회를 열었어요. 550석 되는 작은 공연장이었는데, 700분 넘게 오셨죠. 관객들이 계단에 프로그램북을 깔고 앉아서 볼 정도로 클래식 공연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전국 유일 여성 전문연주인
으로만 이뤄진 민간교향악단

음악에 대한 갈증은 광주 시민들뿐만 아니라 광주를 비롯해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여성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17개 시·도 중 5곳(전북, 전남 강원, 세종, 경남)을 제외한 12개 자치단체에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지만, 적은 민간교향악단 수로 인해 지역민은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고,ᅠ지역의 연주자들 역시 마음 놓고 연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 와중에 여성 연주자들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여성 연주자들에게 광주여성필은 단순한 일자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창단 공연 때 저도 관객으로 갔었어요. 여자들만 연주를 하는데 정말 멋지더라구요. 언젠가 꼭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10년 뒤에 이루어진 거죠. 보통 저녁에 연습을 많이 하는데, 결석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다들 책임감이 높아요. 다른 본업도 있고, 아이를 떼어놓고 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음악이 좋아서 오는 거죠. 주변의 연주자들라면 다들 광주여성필에서 꼭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음악인들의 평가도 높습니다.” (김수진 단원, 바이올린)

광주여성필의 정단원은 90명이지만 김유정 단장의 연락처에는 120명에 가까운 단원들의 연락처가 빼곡하다. 출산과 결혼, 육아 등으로 일정이 가변적인 여성 단원들의 특성상 상비군을 확보하고, 더 많은 여성 연주자들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단원들은 결혼이나 출산으로 일을 중단하게 되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다. 만삭까지 공연에 참여한 단원이 출산 후 2개월 만에 돌아와서 공연에 합류하거나 오케스트라 활동 중에 아이를 셋을 낳은 단원도 계속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모성 보호 역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인이 4중주까지는 금방 만들어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굉장히 다른 영역이에요. 개인의 차원에서는 할 수 없죠. 음악을 다 같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음악인로 느끼는 성취감이 어마어마해요. 그래서 단원들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욕구가 정말 큽니다. 육아 때문에 공연을 못하게 된 단원은 펑펑 울고, 시내에서 공연 배너를 보면 마음이 찢어진다고 해요.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한 단원의 경우는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1년 2번 광주에 내려와 있을 정도예요.” (김유정 단장)

26년 동안 광주시향에서 일했던 김유정 단장은 누구보다도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단원들의 출산 스케줄까지 꿰고 있고, 지방 공연 때는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20여개의 파트별 여분 악보를 따로 가지고 다니는 세심함은 바로 그러한 이해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이해는 후배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할수록 무대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의무로 다가왔어요. 큰돈을 들여서 악기를 사고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갔다 오는 친구들은 늘어나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독주회만 할 수도 없잖아요. 이 친구들과 함께 해야겠다, 이들이 오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공연이 끝나면 단원들한테 ‘선생님, 이번에 연주 함께 해서 너무너무 행복했어요’라는 메시지가 와요. ‘너무너무’란 단어를 쓸 정도로 행복해 하는데 또 다음 공연을 준비할 수밖에 없죠.”



‘주사위 작곡법’ 활용한 참여형
공연 프로그램 만들어 큰 호응

광주여성필이 느끼는 책임감은 내부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각종 국고 지원 사업에 응모해 받은 기금으로 지역민들을 위한 공연과 봉사 활동도 이어간다.ᅠ요양기관, 복지기관, 근로공단, 병원, 학교 등을 방문하는 ‘찾아가는 음악회’로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고,ᅠ소외계층에게 음악의 기회를 주고자 다문화 M(Multiculture)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지난 2010년부터는 ‘사회환원사업 음악나눔’의 일환으로 다문화음악학교를 운영하며 다문화 가족 75명에게 무료 악기교육을 펼쳐 왔다. 지금까지 8번에 걸친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지난 2013년에는 광주문화재단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ᅠ

오케스트라는 필연적으로 노동집약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심포니를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해서는 80여명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한 명이 빠져서도 안 되며, 대규모의 인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예술이다. 이들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공연장 역시 필요하다. 오케스트라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재화는 많고 그것은 시대가 변한다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임금 상승으로 인해 전체적인 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케스트라가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중과의 스킨십을 늘리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올해로 창단 100주년을 맞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ᅠ연 100회 이상의 무료, 사회공헌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소외계층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다. 연주자들의 50를 여성, 유색인, 장애인으로 구성하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역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고 클래식 시장의 미래 및 잠재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어린이, 청소년, 사회의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예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이미 소수가 아닌 사회의 공공재가 되는 것을 생존법으로 택한 것처럼 광주여성필 역시 스펙트럼 넓은 공연으로 잠재 관객을 개발하고 미래의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가벼운 곡부터 마니악하고 규모 있는 교향곡과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는 광주여성필의 공연 중 아이들과 학부모로부터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주사위 음악, 피터와 늑대’가 그것이다. 4년째 이어오고 있는 공연은 16마디의 미뉴에트와 16마디의 트리오를 가지고 주사위를 던져 주사위 값에 해당하는 것을 선택, 조합해 즉석에서 곡을 만든다.

“모차르트가 마디에 음표를 그려놓고 주사위 던지면서 나오는 조합으로 음악을 만들면서 놀았다고 해요. 16마디를 만드는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로 나오는데 저희가 아마 세계 최초로 개발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에게 직접 큰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수에 해당하는 마디로 곡을 만들어서 스크린에 띄워요. 단원들은 스크린을 보고 처음 보는 악보를 연주하는 거죠. 4년에 걸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매번 공연할 때마다 매진되고 내년에도 꼭 해달라고 매년 요청이 들어와요.” (김유정 단장)

“아이들이 호응이 엄청나요. 클래식 공연은 관객 나이 제한 있는데, [주사위 공연, 피터와 늑대]는 4살부터 들어올 수 있다 보니까 아이들이 공연장 예절도 배우면서 즐겁게 연주를 들을 수 있죠. 단원들 역시 처음 보는 걸 연주하는 거라 재미있어하죠.” (김수진 단원, 바이올린)

광주여성필은 최근 창단 20주년 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국지휘자협회에서 진행하는 연수과정에서 최우수 지휘자로 선정된 지휘자 박승유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협연으로 진행된 공연은 서울에서도 관객들이 찾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광주여성필은 지역사회의 인정을 받으며 전국적인 명성까지 쌓고 있지만 김유정 단장은 관객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감동적이고, 그 감동을 계속 관객들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광주시립발레단과 함께 공연을 했는데 SNS에 소감이 올라왔더라구요. 앞으로 한국의 모든 발레단들은 광주여성필하고 반드시 같이 음악을 해야 한다, 발레 공연을 보면서 음악까지 감동을 주는 건 처음이었다고요. 감격이었죠. 좋은 지휘자와 협연자를 모시고 좋은 음악을 해서 다시 그 감동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또 단원들한테도 돌려주고 싶어요. 저희는 오케스트라다 보니까 인원이 많아서 단원들의 출연료가 참 약소한데, 앞으로 최대한 단원들에게 많이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연주자 예우를 제대로 해주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이자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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