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클리공감] “호기심과 열정으로 무한한 꿈 키워요” | ||||||||||||||
---|---|---|---|---|---|---|---|---|---|---|---|---|---|---|---|
작성일 | 2017-10-23 | 조회 | 10734 | ||||||||||||
첨부파일 | |||||||||||||||
“호기심과 열정으로 무한한 꿈 키워요” [고정관념 깨고 도전하는 여성들] ‘남성 직업’에 도전하는 열정 여성을 만나다
여성 운전자 수가 1000만 명을 넘었다. 전체 운전자의 40에 달하는 비율이다. 그렇지만 자동차 정비사는 대다수가 남성이다. 여성 정비사는 전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김희숙 대표는 그중 한 명이다. 자동차 영업사원을 하던 남편이 정비공장을 차리며 뛰어든 게 계기였다. 용품을 판매하며 경영을 돕던 그는 알음알음 자동차 정비까지 알아갔다. 어느새 2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기름 냄새가 화장품 냄새보다 익숙하지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용품 판매부터 쉽지 않았다. 정비업계에 존재하는 은어 탓이었다. 우리가 잘못 사용하는 ‘빵꾸’나 ‘빠떼리’는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상에서 한두 번 들어봄직한 용어였으니까. “세루모터를 손봐야 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용품 목록에는 ‘세루모터’가 없었다. 이는 스타트모터를 뜻했다. “데후 오일 교환해주세요.” 이것도 디퍼런셜 오일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어는 점차 익숙해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호기심도 생겼다.
자동차 정비는 자격증 소지가 필수는 아니다. 그는 곁눈질로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 동료들의 뒷말이 심심찮게 들렸다. 정비를 할 때도 고집을 부리고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지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님에게서도 얕잡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묵묵히 견디며 정비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렀고 색안경이 벗겨지면서 차츰 동료들은 같은 정비사로 대해줬다.
여성 고객도 믿고 찾는 자동차 정비공장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도 늘었다. 특히 여성 고객 비율이 높았다. 여성 운전자들은 으레 정비공장 방문을 어려워한다. 차량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 고객에게 바가지요금을 청구한다는 오해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정비공장을 찾는 게 저렴해도 대행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 씨를 알게 된 여성 고객들은 정비공장 찾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고 차주가 자동차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자동차 정비사로 안정적 궤도에 오르자 김 씨는 또 다른 갈증이 일었다. 알음알음 배웠기에 고장에 따른 수리는 할 수 있어도 고장의 원인과 과정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맞을 때면 고객을 기만하는 것 같았다. ‘기초부터 다시 배워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경기도기술학교를 찾았다. 원리를 이해하고 바라보니 자동차가 새롭게 보였다. 몇 달간 주경야독을 이어갔고 ‘자동차정비기능사’에 한 번에 합격했다. “그 나이에 뭐 하러 힘들게 공부하느냐”고 묻던 주위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 그는 타성에 젖은 동료들에게 자극이 되고 있다.
김희숙 대표는 자동차 정비사가 여성에게 좋은 직업이라고 했다. 물론 타이어를 탈착하거나 헤드를 내리는 일 등 힘이 필요한 작업들이 종종 있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자동차 도색의 경우 여성 정비사가 남성 정비사보다 기량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는 ‘자동차정비기능사’에 이어 ‘자동차튜닝사’도 1차 합격한 상태다. 앞으로 ‘자동차정비기사’에까지 도전하겠다는 목표가 그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한다.
“자동차 산업 시장은 무궁무진하게 커질 거예요. 남성만의 영역도아니에요. 자신감과 책임감만 있다면 여성도 좋은 기술자가 될 수 있어요.”
피아노가 평생의 업인 줄 알았다. 피아노 전공으로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후 강습을 하며 피아노와 함께한 세월이 36년이었으니. 하지만 보이스피싱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기존의 생활 방식으로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때 무심코 던진 지인의 말이 채신혜 씨의 삶을 180도 뒤집어놓았다. “용접을 배워봐요. 용접사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데.”
“용접이 뭔데요?”라고 되물을 만큼 아무것도 몰랐지만 먹고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용접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도움이 될까 싶어 지게차, 굴삭기 면허도 취득했다. 결국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으로 용접용 토치를 쥐었다. 아름답던 피아노 선율은 쨍한 기계음이 됐다.
화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든 용접 토치
뜻밖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10~20세 차이 나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을 들었다. 곧 현장에 나가 일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날로 커졌다. 비극은 희망 속에 싹트는 것일까. 수업 중 흘러내린 녹물이 몸을 덮친 사고로 하반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모두 그가 용접을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채 씨는 다시 토치를 잡았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통증보다 힘든 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 흉터였다. 불만 봐도 흠칫 놀랐다. 이제 겨우 용접과 친해지던 차에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사고를 극복해내고 마침내 학교를 졸업했다. 어엿한 용접기능사가 된 채 씨는 현장에서의 기본적인 안전사항을 반드시 지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시련 뒤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어려운 세계였다. 동료 모두가 남성인 세계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같은 일을 해도 급여가 20~30 적은 데다 기회가 잘 주어지지도 않았다. 분명 잘할 수 있는데 손을 내미는 곳이 없었다. 용접 작업을 할 때는 무거운 자재를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해 강인한 체력도 필요했다. “여자가 얼마나 힘을 쓰겠냐”는 비아냥은 깊은 곳의 독기를 끌어올렸다. 악착같이 버텨내 이제 용접사가 된 지 5년째다.
5년 전과 달리 지금은 일한 만큼 보수도 받고 대우도 받는다. 얕잡아 보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채 씨만의 강점도 있다. 용접사가 되기 전에 취득한 지게차, 굴삭기 자격증을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용접 업무의 특성상 현장에서 장비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배관·탱크를 개·보수하며 용접 토치를 들고 있자니 수없이 싸워왔던 시간이 스쳐간다. 불꽃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했다. 용접을 하고 있으면 오로지 불꽃에 집중할 수 있다. 피아노와 함께한 삶도 즐거웠지만 이제 그는 불꽃에 온전히 매료됐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용접사를 할 거냐고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재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전투기가 뿜어내는 굉음에 절로 물러서게 된다. 한눈에 봐도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감에 압도되기까지 한다. 전투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남성 조종사가 내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결연한 눈빛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여성 조종사다. 올해 초 우리 공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 비행대장에 이름을 올린 세 명 중 하정미 소령이다. 공군 전투비행대장은 전투비행대대의 모든 작전 임무와 훈련을 감독하고 후배 조종사의 교육을 계획한다.
199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하 소령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입학 계기와 처음으로 전투기를 조종했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창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공군사관학교 여생도 선발’이 이슈였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기질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편이거든요. 일반 대학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커리큘럼에 마음이 움직였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 매료됐던 것 같아요. 전투기 첫 조작은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하지만 공부하고 연구한 것으로 모든 게 가능한 건 아니더라고요.”
하 소령은 2006년 보라매 공중사격대회에서 저고도 사격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이후 기종 전환에도 도전해 2007년 주력 전투기인 KF-16의 첫 여성 조종사로 거듭났다. KF-16은 하 소령이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꿈을 갖게 해준 기종인 만큼 그의 도전은 주저함이 없었다.
도전을 망설이지 않는 성격 때문일까. 하 소령은 자신이 비행대장으로 임명된 데 대해 “그것은 단순히 다른 남성 동료들만큼 비행하고 업무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은, 또 한 번의 관문 통과를 의미한다”면서 “‘최초 여생도’, ‘최초 여성 전투 조종사’ 등 선배들의 발자취가 역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여군 조종사들의 기록이 과거에 그치지 않고 향후 전투비행대대의 지휘관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갈 길이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진행형을 만들었다는 데 의미를 뒀다.
내 도전이 후배에게 길잡이 됐으면
첫 여성 전투 조종사가 등장한 때는 2002년이다. 당시만 해도 여성 조종사에 대한 검증이 완료되기 전이라 고성능 항공기, 대형 항공기 운용대대에 배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달라졌다. 여성 조종사들이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사회적으로 성 역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전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어요. 더불어 여성 관련 기사에 늘 따라붙던 ‘최초로’, ‘유일하게’라는 수식어가 이제는 ‘최고의’, ‘탁월한’으로 대체되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봐요.”
하 소령은 이미 자신의 영역에서 선두 주자에 올라섰지만 도전 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현재 위치에서 열심히 하면 또 다른 한계를 넘어설 것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후배들에게 보다 쉬운 길을 열어주고 싶다.
“발굴하고 개척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에요. 도전하는 그 모습만으로도 멋있지 않나요? 항상 꽃길만 걸을 순 없지만 하얀 눈밭을 뒤따르는 누군가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는 발자국을 찍는다는 것도 소중한 시도죠.”
장갑을 벗자마자 손가락 끝이 살짝 얼었다. 눈썹 위로 흐르던 땀방울은 금세 얼어붙었다. 눌러쓴 고글에는 옅은 얼음이 맺혔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하 37도의 추위 속을 내달렸던 한 여성은 그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오지 탐험가이자 기부 마라토너인 양유진 씨의 이야기다.
오지 곳곳을 달리는 양 씨의 모습을 상상하기엔 그의 체구는 상당히 작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자신이 달리는 이유와 목표를 밝히는 목소리와 눈빛은 누구보다 또렷했다. 몸 이곳저곳에 난 상처와 물이 차오르는 무릎이 영광의 흔적이라며 웃어 보였다.
“대학 시절 모 컨설팅 기업에서 인턴을 하던 중 의문이 들었어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니 남들처럼 스펙을 쌓기 위한 과정을 밟아왔을 뿐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도전한 경험이 없더라고요. 내가 해보지 않은 것 중 가장 힘든 것을 고민했고 그게 마라톤이었어요.”
기부와 연계한 가슴 벅찬 질주
양 씨는 우선 국내 주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며 새 도전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도전의 성과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또 다른 도전에 대한 열망이 꿈틀댔다. 흔히 열악하다고 말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싶었고 그렇게 눈을 돌린 곳이 사막 마라톤이었다.
사막 마라톤은 5박 7일 동안 무동력 하에 250km를 달려야 한다. 식량과 침낭, 비상약품, 옷가지 등을 담은 10kg의 배낭은 덤이다. 대회 주최 측이 10km마다 소량의 식수를 제공하나 그마저도 부족해 경기를 포기하는 참가자들도 있다.
2014년 26세의 양 씨는 그해에만 세계 3대 마라톤인 사하라사막 마라톤, 고비사막 마라톤, 칠레 아타카마사막 마라톤에 모두 출전했다. 이 중 해발고도 3200m부터 시작하는 아타카마사막 마라톤은 그가 완주에 실패한 유일한 대회다. 처음 겪는 지독한 고산병 증상 탓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후 그는 고산병 대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고 2018년 9월 아타카마사막 마라톤 재도전을 앞두고 있다.
양 씨의 달리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단순히 자신의 도전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 사회봉사와 연계시켰다. 자신이 뛴 만큼 기부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방식의 스포츠 기부다. 장애아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어릴 적 막연한 꿈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실현해가는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 수익 중 일부는 기부를, 또 다른 일부는 대회 비용으로 소요하고 있다.
양 씨의 좌우명은 ‘저지르고 후회하자’다. 매번 대회 현장에서는 ‘내가 왜 또 이곳에 왔는가?’라며 후회하면서도 가슴 벅찬 성취감에 절대 포기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내년 초 예정된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기 위해 오늘도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말한다.
“오지를 다니면서 나눔을 실천하고 누군가에겐 용기와 영감을 주고 있는 제 미래의 모습을 늘 그려봅니다.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것이 있는 분이 계신다면 망설이지 말라는 조언을 전하고 싶어요.”
[위클리공감]
|